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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멸망과 고려에 끼친 영향

by arirangyo 블로그 입니다. 2025. 9. 6.

 

고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발해(渤海)가 926년 거란(契丹)의 침공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한 사건은 한반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실로 경악스러운 역사의 변곡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중대한 사건은 단순한 한 국가의 소멸을 넘어, 이후 건국될 고려(高麗)의 국가 정체성과 대외 정책, 그리고 사회·문화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발해의 멸망이 고려에 어떤 파장을 불러왔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그 역사적 함의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과연 해동성국의 소멸은 한반도의 역사 흐름을 어떻게 바꿔 놓았을까요?

해동성국 발해의 번영과 비극적인 종말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에 의해 건국된 이후, 광활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기상과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8세기 후반 문왕(文王) 시기에는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국력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계를 갖추고, 발해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당의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계획도시로서 국제적인 위상을 자랑했습니다.

발해의 국제적 위상과 위기 요인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新羅)는 물론 일본(日本)과도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하지만 발해의 국력은 9세기 말부터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층의 내분,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갈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방에서 급부상하던 거란족의 위협이 발해를 옥죄어 왔습니다. 특히 요동 서부에서 세력을 키운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요(遼)나라를 건국하며 그 위협이 현실화되었고, 발해는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거란의 침공과 발해의 멸망

발해의 멸망은 926년 거란족의 대규모 침공으로 단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실로 충격적입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불과 며칠 만에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함락시키고, 발해를 멸망시켰습니다. 발해가 이처럼 급작스럽게 무너진 배경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내부적인 불안정, 방어 체계의 허술함, 그리고 거란의 강력한 군사력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백두산 분출과 같은 자연재해가 국력을 약화시켰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으나, 결정적인 요인은 거란의 압도적인 군사력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결말은 동북아시아 질서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서막이었습니다.

발해 유민의 대규모 망명과 고려의 수용 정책

발해의 멸망은 수많은 발해 유민들을 고향에서 쫓겨나게 만들었으며, 이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상당수가 고구려의 후계국을 자처하던 고려로 향했으니, 이는 실로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 규모와 경로

926년 발해 멸망 이후, 발해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포함한 수만 명에 달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했습니다. 발해의 마지막 태자인 대광현(大光顯)을 필두로 한 망명 행렬은 당시 고려 초기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의 북쪽 국경을 통과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이들을 매우 환대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을 강화하고, 나아가 북방 영토 회복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태조 왕건의 포용 정책과 그 배경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단순한 난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씨를 하사하고, 그들을 고려의 종실에 편입시켰으며, 발해의 관료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하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왕건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고려가 고구려의 적통을 계승하여 북방 민족까지 아우르는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둘째, 발해의 우수한 인재와 기술력을 흡수하여 고려의 국력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셋째, 거란에 대한 공동의 적개심을 기반으로 하여 발해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미래의 북방 영토 회복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고려의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던 셈입니다!

고려의 대외 정책과 영토 의식에 미친 영향

발해의 멸망은 고려의 대외 정책, 특히 북방 정책과 영토 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거란과의 직접적인 대치 상황을 초래했으며, 이는 곧 고려의 존망을 결정하는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북진 정책의 태동과 강화

발해의 멸망으로 발해의 광대한 북방 영토는 사실상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고, 이는 고려에게 새로운 영토 확장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 멸망 이후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라"는 유훈을 남기며, 북진 정책(北進政策)을 국가의 핵심 목표로 설정했습니다. 발해 유민의 유입은 이러한 북진 정책에 명분과 인적 자원을 제공했으며, 고려는 청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강력한 북방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한반도 내의 통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북방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란과의 첨예한 대립과 외교 전략

발해 멸망 이후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도 고려를 압박하며 조공을 요구하는 등 끊임없이 위협했습니다. 고려는 거란을 "오랑캐"로 규정하며 배척하는 강력한 반(反)거란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발해 유민들이 가지고 있던 거란에 대한 적개심과 고구려 계승 의식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대립은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에 걸쳐 벌어진 세 차례에 걸친 여요전쟁(麗遼戰爭)으로 이어졌으며, 고려는 서희(徐熙)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통해 거란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국방력을 과시했습니다. 발해의 멸망이 직접적으로 고려-거란 관계의 격동을 불러온 것입니다.

고려 사회와 문화에 새겨진 발해의 흔적

발해의 멸망은 비단 정치·외교적 측면뿐만 아니라, 고려의 사회·문화 전반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발해 유민들의 유입은 고려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문화적 다양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구 구성의 변화와 사회 통합

수만 명에 달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편입되면서, 고려는 인구 구조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발해의 지배층과 기술자, 일반 백성들은 고려 사회의 다양한 계층으로 흡수되었습니다. 특히 발해의 뛰어난 기술자들은 고려의 건축, 공예, 농업 기술 발전에 기여하며 사회 전반의 발전에 일조했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이질적인 문화와 생활 방식 때문에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갈등이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고려 왕조의 적극적인 포용 정책과 고구려 계승이라는 강력한 동질감 속에서 점차 사회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발해 유민들은 고려의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국가 발전에 헌신했으며, 이는 고려 사회의 저변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문화적 교류와 기술 전파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발해의 멸망은 이러한 발해의 문화적 유산이 고려로 유입되는 통로를 열어주었습니다. 발해의 독창적인 건축 양식, 뛰어난 도자 기술, 그리고 다양한 공예품 제작 기술 등은 고려의 문화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의 기와 제작 기술이나 불교 미술 양식은 고려 시대의 문화유산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발해의 문화는 고려 문화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어, 고려 시대 문화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고대 한국 문화가 단순한 계승을 넘어 다양한 요소들이 융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발해의 멸망은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재편을 가져온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특히 고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발해의 유민들은 고려의 북진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거란과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사회와 문화의 구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렇듯 발해의 소멸은 고려의 국가적 정체성 확립과 미래 지향적 발전에 실로 중요한 발판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발해의 비극적인 종말이 고려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